2008년 1월 23일 수요일

[신년 특집] ‘상반기 100개 기업 상장 대기’

김남구 한국투자증권 부회장, 김성태 대우증권 사장, 김지완 현대증권 사장, 박종수 우리투자증권 사장, 이상준 브릿지증권 회장,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사장…. 내로라하는 국내의 대표 증권사 CEO들이 지난 세 달 사이 모두 베트남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증권사 CEO들이 일 주일이 멀다 하고 베트남을 찾아가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저기 강 너머 개발이 한창인 곳이 보이죠. 투티엠이란 지역입니다. 조만간 투티엠과 호치민 중심부를 잇는 다리가 완공되고 도시가스 배관이 저곳을 관통할 거예요. 2010년쯤이면 투티엠이 호치민의 여의도가 될 것입니다.”

호치민의 메콩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선화(善華) 빌딩 14층. 우리투자증권의 임송학 호치민 사무소장은 메콩강 너머 볼품 없는 황무지를 가리키며 한껏 들떠 있었다. 지난 10월 호치민으로 건너온 임 소장은 국내 증권업계의 스타 애널리스트였다.

2000년대 초 국내 K증권사 근무 당시 국내 한 경제지로부터 ‘최고의 투자 전략가’로 3년 연속 수상했다. 하지만 2005년 코스피지수 전망치를 700∼950선이라고 비관적으로 제시했던 게 화근이 돼 리서치센터장에서 물러나게 됐다. 대부분의 증시 전문가들이 장세를 낙관했지만, 그는 비관적이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자리를 박차고 나온 그는 이후 브릿지증권을 거쳐 일 년 정도 증권 전문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한동안 업계를 떠났던 그가 우리투자증권의 베트남 진출사업을 자청하며 다시 돌아왔다.

그는 “베트남에서 직업을 가진 것은 이번이 두 번째”라며 “98년 친구가 이곳에서 운영하던 회사의 기획실장으로 7개월 동안 일한 적이 있었다”고 밝혔다. “당시엔 준비가 부족했기에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임 소장처럼 현지 지사장들은 자녀를 현지 외국인 학교에 보내기 위해 해외 근무를 자청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임 소장은 결혼도 하지 않은 싱글이다. 그가 베트남에 온 이유는 단순하다. “베트남에서 더 많은 기회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발전 가능성이 있는데다 아직 낙후돼 있다는 것이 더 매력적”이라며 “글로벌 자본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승부를 걸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임 소장이 이끄는 우리투자증권의 베트남 현지 사무소를 비롯해 베트남에 진출한 국내 증권사는 8개사다. 모두가 지난 6개월 사이에 호치민에 사무실을 열었다.

증권사마다 개소식엔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김남구 한국투자증권 부회장, 박종수 우리투자증권 사장, 김성태 대우증권 사장, 김지완 현대증권 사장 등 유명 국내 증권사 CEO들이 직접 베트남 현지로 찾아와 주재원들을 격려했다. 도대체 베트남 증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지난해 초만 해도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몰려 있던 베트남 증시는 지난 3월부터 갑자기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증시 과열과 물가 상승에 부담을 느낀 베트남 정부가 강력한 규제정책을 내놨기 때문이다. 은행에서 대출 받은 자금의 3% 이상은 주식에 투자하지 못하도록 못 박으면서 개인 투자를 줄였다.

기업들도 무리하게 증자를 거듭하며 주식에 투자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정부가 증자 요건을 까다롭게 바꾸고 사용 내역을 꼼꼼하게 관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00개 넘게 예정돼 있던 기업공개(IPO) 일정도 대부분 연기됐다.

베트남 정부 관계자는 “무리한 주식 투자로 파산하는 개인과 기업이 크게 늘었고, 물가도 상승할 기미가 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연초 1,170까지 뛰었던 베트남 종합주가지수는 지난 9월까지 900대를 오르내리며 답보 상태를 보였다.

하지만 지난 가을부터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공기업 민영화에 다시 팔을 걷어 부쳤다. 특히 공모액만 4조원이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는 베트콤은행의 IPO가 12월 26일로 결정되자 투자 열기가 확 살아났다. 베트남 정부는 베트콤은행을 필두로 2008년에 그동안 미뤘던 100개가 넘는 공기업들을 모두 민영화하겠다는 방침이다.

임송학 소장은 “외국인이 종목당 49% 이상을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량 종목엔 투자하고 싶어도 유동 물량이 없어 투자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IPO가 이어지면 외국인 투자의 물꼬가 다시 트이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투자증권의 김범준 차장은 “종합주가지수 1,500선을 넘기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단언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국내 증권사들도 다급해졌다. 대부분 베트남에서 시장 조사를 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차에 정부 규제가 풀어지고, 호재가 쏟아지자 지점 설립에 대거 나서기 시작했다. 모두가 하루빨리 베트남 금융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야심이다. 하지만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길은 각양각색이다.
 


한국투자증권 ‘탄탄한 현지 네트워크’ = 베트남에 가장 먼저 진출한 국내 증권사는 한국투자증권이다. 현지 사무소는 지난 9월에 문을 열었지만 2004년부터 호치민에서 리서치를 벌이며 활동해 왔다. 실제 진출한 지 3년이 넘었다. 현지에서 해외 금융사로선 최초로 베트남 투자 펀드를 운용했다.

한국투자증권의 송범진 소장은 “모두가 베트남을 외면했을 때 한국투자증권은 이곳에서 사업을 벌였다”며 “현재 우리 베트남 펀드가 다른 펀드에 비해 높은 수익률을 올리고 있는 것도 오래된 현지 네트워크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한국투자증권이 법인 등록을 미룬 채 사무소 형식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베트남에서 법인이 아닌 사무소는 현지 시장조사와 네트워크 관리 수준 이상의 사업을 벌일 수 없다. 하지만 송 소장은 한국투자증권의 영향력을 키운 후 법인 설립을 검토해도 늦지 않다는 입장이다.

“지금 그들에게 우리는 파트너의 입장입니다. 그들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우리는 이를 분석해서 높은 수익을 올려왔죠. 하지만 우리가 현지 법인을 설립하면 그들과 경쟁 관계가 됩니다. 실력과 자금을 확보할 때까지 기다려야죠.”

미래에셋 ‘법인 설립으로 정면승부’ = 현재 베트남 진출에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곳은 미래에셋증권. 12월 21일 호치민에 법인을 설립한 미래에셋은 한국투자증권과는 다른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베트남에 진출하자마자 법인을 설립하며 현지화를 시작했다. 정성문 법인장은 “현지화는 진출한 순간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라며 “지금 못하면 시간이 지나도 자리 잡기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 미래에셋의 행보는 다른 증권사보다 훨씬 빠르고 파격적이다. 지난해 하노이에 미래에셋맵스 자산운용을 설립한 후 2007년 초 호치민으로 자리를 옮겨 미래에셋증권 호치민 사무소를 열었다. 그리고 12월엔 이를 법인으로 바꿔 등록했다.

미래에셋의 베트남법인은 전체 직원 50명 중 45명이 현지인이다. 정 법인장은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아니라 베트남 기업으로 자리 잡을 생각”이라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우리투자증권 ‘돌다리도 두드려가며 건너라’ = 가장 최근 문을 연 우리투자증권의 임 소장은 더 신중한 모습이다. “상장사가 212개사 뿐이라 ‘지를 만한’ 곳도 없어요. IPO가 많다고 하더라도 업체당 수수료가 1만 달러 정도 밖에 안됩니다. 지금 설립된 증권사들만 100개가 넘고, 개중에는 이벤트로 주식중개 수수료를 받지 않는 곳도 있어 비즈니스 모델을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해선 누구보다 낙관적이다. 주가 대비 수익률의 경우 중국 시장이 평균 70배이지만 베트남 기업들은 평균 30배 내외로 높은 편은 아니라는 것.

그는 또 “전 세계적으로 향후 10년 이상은 원자재 부족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며 “풍부한 원자재를 확보하고 있는 베트남이 두각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임 소장이 추천하는 업종은 금융·서비스·정보기술(IT)이다. 그는 “과거 한국의 삼성전자나 SK텔레콤처럼 대박이 나는 종목이 곧 나오게 될 것”이라며 활짝 웃었다.

대우증권·현대증권 ‘현지업체 제휴·인수 노려’ = 지난 11월 6일 호치민에 사무소를 개소한 대우증권은 현지 증권사인 바오이엣 증권과 업무계약을 맺으며 베트남에 진출했다.

대우증권의 손종민 지사장은 “현지증권사를 통해 국영기업의 민영화 관련 컨설팅과 지분 투자 사업에 뛰어들 예정”이라고 말했다. 11월 8일 문을 연 현대증권 호치민 사무소는 베트남 투자펀드 출시뿐 아니라 베트남 증권사 인수도 추진하고 있다.

현재 베트남 현지 진출 증권사들의 가장 큰 고민은 이미 불붙은 글로벌 기업과의 경쟁이다. 예컨대 12월 말 베트콤은행 상장을 놓고선 골드먼삭스·GE캐피털·노무라증권 등 쟁쟁한 글로벌 업체들이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 틈에서 한국 증권사들은 찾아볼 수 없다.

또 2006년에 외국인 투자법을 대대적으로 손질했지만 법령도 너무 자주 바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 베트남 현지 기업들의 불투명성도 걸림돌이다. 임 소장은 “전산화가 안 돼 있어서 내부자나 부정 거래가 여전히 많다.

또 베트남 회사들은 이익이 나면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를 위해 유상증자를 자주 하기에 이익만큼이나 주가가 오르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국내 증권사 CEO들의 베트남행은 당분간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포기하기엔 너무나 큰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이 더 탄 사이공증권 호치민 지사장
“베트남 주식 시장 훨씬 탄탄해져”



“2006년 156개의 공기업이 민영화 되며 증시가 크게 성장했지만 ‘묻지마 투자’가 급증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정부는 증시 과열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7년엔 불과 17개의 기업만 민영화했다.”

베트남 최대 증권사인 사이공증권(SSI·Saigon Securities Imc.)의 부이 더 탄(Bui The Tan) 호치민 SSI 지사장은 지난 2007년을 “고성장을 위해 기반을 다진 한 해”라고 정의한다. 그는 “성장을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라며 “정부의 규제로 성장은 조금 늦춰졌을지 몰라도 베트남 주식 시장은 훨씬 탄탄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연초에 비해 외국인 투자가들이 크게 늘어난 것도 주목할 점이라고 강조했다. 부이 지사장은 “지난 10월부터 외국인 투자가들을 만나는 일정이 많아졌다”며 “하루에 1~2번씩 외국인 투자가들을 만나 베트남 투자에 관해 논의한다”고 말했다.

현지에 진출한 국내 업체 관계자는 “예전엔 한국에서 투자단이 찾아오면 사장이 직접 나와서 브리핑을 해줬지만 이젠 본사 CEO가 찾아 와도 사장과 미팅 시간을 잡기 어렵다”며 베트남 증권업계의 달라진 위상을 귀띔했다.

부이 지사장은 “올해 굵직한 회사들이 속속 민영화 된다는 데 주목해달라”며 “2008년은 베트남 증시가 한 단계 성장하는 해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